좀처럼 눈이 쌓여있는 풍경이 보기 드문 제주에 하얀 눈이 밤사이 선물처럼 쌓였다. 눈부신 설렘으로 아침을 맞으니 아직은 감성이 살아있는 나에게 한편 안도감을 느낀다.
어릴 적, 나는 유난히 눈을 좋아했었다.
온 세상을 하얗게 바꾸어 놓은 백설의 아침을 맞는 날이면 시린 손 마다하지 않고 두 손 듬뿍 눈을 퍼 올려 날리며 아무도 밟지 않는 새길 위를 걸어가던 시절이 생각난다.
굴뚝에 하얀 연기 피어오르면 무쇠솥 가득, 달콤한 고구마가 익어가는 부엌, 처마 밑에 매달린 고드름으로 마른 입술 적시던 고향 집 겨울 풍경이 창문 너머 아른거리는 아침이다.
제주의 겨울은 내 어릴 적 고향 풍경보다 한결 따뜻하고 포근하다. 제주에서 첫 겨울을 보내던 그해엔 너무도 신기한 것들이 눈에 들어왔다. 드넓은 대정 뜰에 펼쳐진 동그란 양배추의 엉덩이가 푸르고 마늘과 양파의 치켜세운 고갯짓이 한겨울 들판에 가득함은 참 신선했었다.
지금 나는 그 신선한 제주의 겨울을 6번째 바라보고 있다.
야자 나뭇잎 주름치마가 춤을 추며 바람에 휘청이고 키 낮은 푸른 소철은 하얗게 눈을 뒤집어쓰고, 먼바다에 하얀 포말이 끝도 없이 밀려왔다 밀려가는 이곳, 오늘 아침 풍경을 바라보며 내 삶을 반추하는 시간을 즐기면서…….
요즘 자주 동백꽃 길을 걷는다,
얘기 동백 꽃잎이 떨어져 쌓인 길을 걷노라면 나의 삶마저도 꽃길만 걸어온 듯 행복함에 빠진다, 힘들고 어두웠던 지난 일들은 까맣게 잊히고 어디서 일곱 난쟁이가 등장할 것만 같은 동화 속으로 빠져든다.
이렇듯 내 노후를 여유롭게 하는 제주의 따스함 뒤에 숨겨진 동백의 아픔이 때론 떨어진 꽃잎만큼이나 가슴을 적신다.
명분도 없이, 이유도 모른 채 송이채 떨어진 동백이 의미하는 아픔이 깊은 것을 제주에 살면서 비로소 알았다.
슬픈 꽃잎이 바람에 날리고 하얀 머릿수건 동여맨 순박한 원주민의 하얀 알몸이 떨면서 떨어지던 피멍 든 세월.
중산간에 불던 모진 바람이 쏟아내던 가슴 시린 핏빛의 동백꽃!
말 못 한 채 스러진 그 아픔들을…….
그나마 다행인 것은 그날의 아픔이 재조명되고 있고 억울한 주검들의 유해나마 찾으려는 정부의 노력과 한 서린 넋을 위로하려 묘역을 마련하고 생존한 유가족들의 명단을 찾아 위로금을 신청받는다 하니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가.
아파하는 영혼들을 다독여 치유하고 상처로 남은 제주 사람들 곁에 따스한 봄바람이 부는 날은 언제가 되려는가.
이제 봄이 되어 다시 피어나는 노란 유채꽃 물결이 일렁이듯 환한 평화의 섬으로 거듭나기를.....
정박했던 선박들이 항구를 박차고 힘찬 뱃고동을 울리고
한라산도 긴 얼음의 시간 속에서 깨어나 기지개를 켜고 봄의 향연을 준비하는 것처럼 지난 아픔을 잊었으면 좋겠다.
지난날 아픔으로 얼룩진 세월만큼 따스한 햇살 비추어 선물 같은 봄빛 행복을 꿈꾸었으면 하는 바램을 가져본다.
아침이면 우뚝 선 한라산을 바라보고 벅찬 힘을 얻고 지척의 바다에서 용트림의 활력을 얻어서 하루를 시작한다.
자연이 가져다주는 한가로운 여유가 늘 편안함을 이끌어 주는 이 땅과 이 땅에 머무는 모든 이들을 사랑하며 오늘도 얘기 동백 흩뿌려진 꽃길을 걸으며 기도한다.
머지않아 유채꽃 물결이 노랗게 하늘거리는 제주의 봄을 기다리며...
동백꽃 울음 떨구고
신광숙
툭! 한 잎
떨어지는 그리움 한 방울
땅 위에 흩어져 살갗이 짓무르고
잊혀져
나뒹군 핏빛 흔적마저 덮던 날
숨겨진
그리움 하늘로 날려 보내놓고
빈 가슴 쓸어내리며 숨죽였던 세월 속
그늘진
담벼락 끝에 동백울음 떨군다